기후 변화 앞에 식물도 ‘진화’를 시작하다
기후 변화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는 요즘, 사람들은 가뭄, 폭염, 태풍 같은 극단적인 기상현상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비단 인간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죠. 들판에 자라는 풀 한 포기, 산속의 나무 한 그루도 환경 변화에 따라 치열하게 적응 중입니다. 예전엔 수천, 수만 년에 걸쳐 나타났던 식물의 진화가 요즘 들어서는 몇 년, 심지어 몇 세대 만에 일어나는 경우도 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북미 서부에서 자생하는 식물 **‘클락시아 푸셀라’(Clarkia pulchella)**입니다. 이 식물은 기후 변화로 인해 비가 오는 시기가 앞당겨지자, 자신의 개화 시기도 자연스럽게 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단 7년 만에 개화 시기가 평균 4일 이상 빨라졌다고 합니다. 식물 입장에서 7년은 세대 수로 치면 꽤 긴 시간이죠. 이처럼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유전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건 진화가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식물들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개화 시기를 조절하거나, 뿌리 구조를 바꾸고, 심지어 씨앗의 발아 조건까지 달라지고 있는 현상은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관찰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적응’ 수준을 넘어, 명백한 유전자 차원의 진화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도시 속 잡초가 먼저 보여준 변화
예상 밖의 장소에서도 진화의 증거는 포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무심코 지나치는 도심의 잡초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진행된 한 연구에서는, 도심 속에서 자라는 ‘콩팥풀’(Crepis sancta)이 시골 지역에 사는 동일 종의 콩팥풀과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도시에서는 콘크리트 사이사이에 씨앗이 떨어져야 싹을 틔울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바람에 멀리 날아가지 않고 바로 주변에 떨어지는 무거운 씨앗이 유리합니다. 반면 시골에서는 멀리까지 날아가야 다양한 서식지를 탐색할 수 있으므로 가벼운 씨앗이 더 유리하죠. 그 결과, 도시의 콩팥풀은 10년 만에 평균적으로 더 무거운 씨앗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버린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유전자 수준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영국 런던의 지하철역 근처에 자라는 ‘잔디’ 종류인데, 지속적인 인간 통행과 매연, 고온 환경에 적응하며 내열성과 내압성이 뛰어난 개체들만 살아남고 퍼져나가고 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생존 압력이 워낙 극단적이기 때문에 이들 잡초는 몇 세대만에 형태와 구조, 내성 수준까지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단지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 기후 변화와 인간 활동이 식물에게 얼마나 강력한 선택 압력을 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시들입니다.
식물 진화의 방향,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이쯤 되면 한 가지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과연 모든 식물이 이렇게 진화할 수 있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빠르게 진화해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식물도 있지만,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들도 많습니다. 특히 온도에 민감하거나, 특정 곤충과의 상호작용에 의존하는 식물일수록 훨씬 더 취약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시기에만 꽃이 피고, 특정 곤충이 수분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공생하던 식물들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기온이 상승하면서 곤충이 활동하는 시기와 식물이 꽃을 피우는 시기가 엇갈리는 ‘생태적 불일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수분에 실패하게 되고, 종의 유지가 어려워지는 거죠. 진화가 빠르게 일어난다고 해도 그 방향이 생존에 꼭 유리하게 작용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흐름은 농업과 식량안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특히 밀, 옥수수, 콩처럼 전 세계적으로 재배되는 주요 작물이 환경 변화에 얼마나 적응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인류 생존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작물들에도 진화적 변화를 촉진하기 위한 유전자 교정 기술이 활용되기도 하고, 자연계의 초고속 진화 사례를 연구해 품종 개량에 활용하려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식물의 초고속 진화는 과학적으로도, 생태적으로도, 심지어는 철학적으로도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환경이 변하면 생명체는 변화한다는 자연의 법칙 속에서, 지금 식물들이 보여주는 ‘빠른 진화’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과 동시에 생명의 놀라운 가능성을 함께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