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변화가 생물 유전자 다양성을 무너뜨린다
예전에는 기후 변화라고 하면 단순히 "지구가 좀 더워졌다"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단순한 온도 변화로 치부하기엔 상황이 너무 심각해졌습니다. 기상이변, 생태계 붕괴, 멸종 가속화까지. 이 모든 현상의 뒤편에는 '유전자 다양성의 붕괴'라는 조용한 위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특정 생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해 지구 생태계 전체의 회복력과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문제죠.
유전자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건 단지 ‘생물이 줄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 종 안에서도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온 유전적 특성들이 사라진다는 뜻이고, 이건 곧 질병, 기후 변화, 환경 스트레스에 대한 생물들의 '대응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 한 번 큰 충격이 오면 회복 불가능할 수 있다는 거죠.
유전자 다양성은 생존의 보험
모든 생물 종은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았습니다. 기온, 습도, 토양, 먹이 조건 등이 다 다른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수많은 유전적 변이를 축적해왔죠. 바로 이 다양성이 생존 전략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병원균이 특정 곤충 종을 공격한다고 했을 때, 유전자가 모두 동일하다면 한 번에 전멸할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 다양한 유전자형을 가진 개체들이 섞여 있다면 일부는 살아남아 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유전자 다양성이 생물 종에 주는 '보험' 같은 역할입니다.
하지만 기후 변화는 이 다양성을 빠르게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더 잦고 강한 이상 기후, 산불, 폭우, 가뭄 등은 특정 지역에서만 살아남던 개체들을 빠르게 사라지게 하고, 살아남은 개체들의 유전적 폭도 점점 좁아지게 됩니다. 이는 유전자 풀 전체를 빈약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종의 생존 가능성을 낮춥니다.
보이지 않는 멸종: 유전적 멸종이 현실이 된다
'멸종'이라 하면 대부분은 어떤 종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를 떠올리죠. 하지만 과학자들은 요즘 '유전적 멸종'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겉보기엔 개체 수가 줄지 않았어도, 유전자 다양성이 붕괴된 상태라면 사실상 멸종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실제로 북극곰, 산호, 고산 식물 등 많은 생물이 이미 유전적 다양성을 빠르게 잃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북극곰은 해빙의 축소로 이동 경로가 단절되면서 서로 다른 유전형을 가진 개체들이 교류하지 못하고, 점점 같은 유전자를 가진 무리만 남게 됩니다. 산호 역시 해양 온도 상승으로 특정 종만 생존하며 유전적 편향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런 유전적 붕괴는 단기간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생물종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며 종 전체를 위협합니다. 문제는 이 현상이 전 세계 생물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도 닥쳐올 문제
유전자 다양성의 붕괴는 단지 생물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식량, 의약품, 생태계 서비스는 모두 생물 다양성과 유전적 기반 위에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농작물 유전자 다양성이 줄어들면, 특정 병해충이나 기후 스트레스에 취약해지면서 수확량이 급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적으로 널리 재배되는 쌀, 밀, 옥수수 품종의 유전적 폭이 과거보다 훨씬 좁아진 상태입니다.
또한 신약 개발의 40% 이상은 자연 생물에서 유래합니다.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생물들이 있어야 그만큼 새로운 약의 후보 물질이 많아지겠죠. 그런데 이 다양성이 무너진다면, 미래 세대가 사용할 수 있는 약의 재료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유전자 다양성의 붕괴는 기후 위기의 '조용한 후폭풍'이자, 앞으로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줄 핵심 리스크 중 하나입니다.
이 문제를 막기 위해선 단순히 멸종 위기종을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전적 다양성' 자체를 보전하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동일한 종이라도 다양한 지역의 개체군을 보전하고, 생물 간의 이동 통로(생태적 연결성)를 확보하는 식의 장기적 생물보전 전략이 필요합니다.
기후 변화 시대, 유전자 다양성은 단지 생태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지금처럼 방관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우리에게 돌아올지도 모릅니다.